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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야기(1) 펜로즈의 계단 by Charlie


편집이야기 시작에 부쳐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부정기 날림 연재물 '편집이야기'입니다. 신문 편집기자로 일한 지 햇수로 4년째인데 만날 올리는 포스팅이라고는 블루레이로 탑을 쌓았네 아마존에서 주문한 블루레이가 배송이 됐네 -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약 30분 정도 고민하다가 뚝딱 만들어낸 날림야매부실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편집기자로서의 경험과 실력, 지식 모두 일천한 저로서는 이번 시리즈를 뭔가 거창한 주제(이를테면 편집(Editing)이란 이런 것!)에 대한 장광설 보다는 편집에 관한 시시한 잡담을 늘어놓는 자리로 써먹어볼까 해요.


경제만 성장하면 된다고? 천만에 말씀
5월 21일 토요일자 출판면의 톱기사(주1)입니다. 주로 주목할만한 신간을 소개하는 지면으로, 작가와의 인터뷰나 고전 명저에 관한 시리즈 기사도 실립니다. 편집자의 재량이 많이 반영되는 지면이기도 하고,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요즘에는 읽기보다는 모으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아 반성하고 있습니다) 매주 즐겁고도 괴롭게 편집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룬 신간은 [성장의 광기] (2011, 뜨인돌)라는 책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마인하르트 미겔의 저작으로 '경제만 성장하면 OK'라는 국가적, 사회적 성장지상주의는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지 못하는 허상이며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폭주에 불과하다 - 라는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숭배] (2011, 바오)라는 책도 비슷한 관점을 담고 있다고 하네요.

전날에 지면 계획을 받고 고민을 시작합니다. 경제 성장을 지상과제로 삼아 부단히 달려왔지만 복지나 행복 같은 삶의 가치는 향상되지 않았다 헐 이게 뭐임 - 는 내용을 무슨 제목으로, 어떤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해보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는 좀체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숙면(...).

주1) 톱기사 or 톱 : 말 그대로 지면의 가장 톱(Top)에 위치한 기사를 의미합니다. 하이퍼링크를 통해 다른 페이지로 연결되는 웹사이트와는 달리 한정된 지면 위에 기사를 배치해야 하는 신문 편집의 특성상, 당일 기사 중 뉴스 가치(news value)가 가장 큰 기사는 지면의 가장 상석(좌측 상단)에 자리 잡게 됩니다. 기사 꼭지와 표, 사진, 그래픽 등의 구성요소를 위계 질서에 따라 배치하고 정렬하는 과정, 즉 레이아웃(layout)은 신문 편집의 가장 근간이 되는 작업입니다. 그 외에 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기사는 사이드(side)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화장실은 유레카!
아이디어는 아침에 들린 화장실에서 배출, 아니 나왔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 (2010)에서 아서가 아드리아네에게 '꿈 속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등장한 '펜로즈의 계단(Penrose Stairs)'이 바로 그것입니다.

펜로즈의 계단이란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가 고안한 '실제로는 존재 불가능한 구조물'입니다. 계속 올라가는 것 같지만 결국 빙빙 돌며 갇혀 있게 되는 이 고약한 무한계단은 2차원상의 착시와 원근법의 왜곡으로 만들어 집니다. 이 불가해한 구조물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예술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네덜란드의 그래픽 아티스트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작품 [오르기와 내려가기 Ascending and Descending] (1960)가 되겠죠.

에셔는 반복적이고 기하학적 패턴을 의미하는 테슬레이션(tessellation)을 활용한 작품으로도 유명하지만 위의 석판화처럼,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물을 정교하게(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게) 구현해낸 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결국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인 '절망의 계단'은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지만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나타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이미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까지 꽂히는 이미지가 생각나면 제목은 자연스레 그 뒤를 따라갑니다.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장 오직 성장... 끝없는 미궁 속을 헤매다
2) 성장이라는 이름의 미궁서 길을 잃다
3) 끝없이 올라가도 결국은 제자리...성장의 역설

하지만 취재부서(문화부) 쪽에서는 위의 제목들보다 더 직설적이고 선언적이며 분명한 제목으로 가기를 원했고, 결국 지면 제목은 성장지상주의는 허구다 라고 달리게 됐습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워요. 이미지가 제가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이미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목은 거들 뿐]™ 수준으로도 충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성/장/지/상/주/의/는/허/구/다/ 요 열 글자의 임팩트를 생각해보면 더 효과적이고 더 강력한 접근 전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행복은 성장 순이 아니잖아요
'한강의 기적' 그리고 OECD 자살률 1위(2009년 기준)의 대한민국. 펜로즈의 계단처럼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은 허상인 시스템 속에서 '수치와 통계로 재단된 성장'에 현혹된 사이 정작 개개인의 행복은 고사(枯死)하고 있는 건 아닐지 -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편집이었습니다. 역시 행복은 지름 순

관련링크
매일경제 2011년 5월 25일자 A25면 기사
순환과 반복으로 확장된 공간 - 에셔의 '불가능한 세계'
부엉이가 선택한 아티스트 1 {Maurits Cornelis Escher}
에셔의 작품 감상
작가 공식 웹사이트(영문)


덧글

  • 2011/07/03 00: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harlie 2011/07/03 12:50 #

    취미가 편집이라니, 이렇게 반가울 데가!! 안녕하세요. 누추한 블로그에 방문 및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응이 별로 없나보다 싶었는데 이렇게 피드백을 남겨주시니 힘이 나네요. ㅋㅋ 현장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저도 아직도 베우고 있는 수준이라 베테랑 선배들 처럼 맛깔나는 편집의 정수를 보여드리기보단 좌추우돌 실수하는 것만 보여드리게 될 것 같아서 걱정부터 되네요. ㅎㅎ 그래도 재밌는 현장 얘기 많이 들려드릴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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