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_와이드형


편집이야기(2) 대구에 살어리랏다 by Charlie


대구(對句) ;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 지은 둘 이상의 글귀.


눈으로 읽지 마세요 입에 양보하세요
개인적으로 신문 기사의 제목은 문장으로써 독해(讀解)하는 대상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독음(讀音)하는 과정을 통해 이해하는 일종의 구어(口語)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 기사의 핵심을 전달하고 더 나아가 기사를 읽게 만드는 역할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제목은 말을 닮아갑니다. 청산유수의 달변이 아닌, 촌철살인의 한 마디 말이죠.

하지만 '죽이는 한 마디'에 집착하다 보면 종종 곤란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읽히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만든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거든요. 일상 생활에서 도통 쓰지 않는 단어나 표현, 과도한 수사(rhetoric)가 가미된 제목은 좋지 못한 제목입니다. 매끄럽게 읽히는 제목을 두고 '입에 붙는다'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저는 제목을 달고 나서 몇 번이고 되뇌곤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은/는/이/가' 같은 조사가 적절하게 사용됐는지, 비슷비슷한 뜻이지만 미묘하게 뉘앙스가 다른 단어들 중에 가장 어울리는 어휘가 선택되었는지, 무엇보다 입에 붙는지 붙지 않는지를 자체 검사(?)하는 거죠.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곧잘 바보 같은 제목을 내놓는다는 게 슬픈 일이죠(...).


반복과 변주의 치명적인 매력

일단 대구를 잘 활용한 제목은 눈에 띕니다. 읽는 맛은 살리면서 의미는 풍성하게 만드는 방법이거든요. 문장은 리드미컬해지고, 의미는 선명해집니다. 랩에서의 라임(rhyme), 시에서의 압운(실은 압운의 영문 표기가 rhyme이지만)처럼, 언어를 조탁하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은 '대구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나 봐요.

5월 28일 토요일자 특집면은 대구 특집이었습니다. 외부 기고로 꾸려지는 지면인데, 각 분야의 전문가 필진들이 보낸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가지고 이런 저런 (편집의 측면에서) 시도를 해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아하는 지면입니다.

메인 꼭지는 올해 상반기 광고 트렌드를 분석하고, 이를 관통하는 광고의 법칙들에 대한 글입니다. 단순히 트렌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본질적인 가치와 전략을 찾아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이드 꼭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美 대통령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메인 꼭지는 제목을 달기가 무척 까다로웠어요. [상반기의 트렌드는 바로 요거!] 식의 제목으로 가자니 [중요한 건 트렌드를 관통하는 법칙]이라는 메시지를 간과하는 것 같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래서 어찌 보면 어중간하고, 좋게 보면 둘 다 포괄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올해 상반기 트렌드를 명시해주되 그 속을 관통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얘기해주자는 거죠. 오! 감사하게도 본문에서 '남과 여, 프로와 아마추어, 전통매체와 신규매체 간의 경계는 허물고 소통과 표현의 장(場)을 넓혀가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해주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바로 제목에 갖다 썼습니다.

경계는 허물고 소통은 넓혀라

하필 여기서 대구 병(病)이 발동하는 바람에 억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1) 꺼져라, 경계
    켜져라, 소통
2) 경계는 꺼지고 소통은 켜지고

위 제목에서 '꺼져라'는 말 그대로 꺼지라(get out)는 의미이기도 하고 경계가 허물어져 땅으로 꺼지거나(sink), 아래 쓰인 켜지다(turn on)의 반대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시엔 '꺼지다/켜지다'의 대구에 꽂혀서,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지금 보면 '경계'와 '꺼지다'라는 단어가 적절한 호응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대구를 맞추기 위해 '입에 붙는' 제목을 포기한 감이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반성! 그런 의미에서 다시 제목을 달아본다면 이렇게(↓).

경계는 허물고 소통은 허하라
                               
(許)

...야 인마 또 대구잖아!? 아 그러니까 편집기자에게 대구는 불치의 병이라니까요.


대구를 넘어 대비로
사이드 꼭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美 대통령의 리더십이 주제였습니다. 사실 그의 사진만 쓰고 제목도 그의 업적과 리더십에 관련된 내용으로만 뽑아도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글은 비슷한 시기에 정권을 잡은 독일의 히틀러와의 비교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었고, 특히 과거(의 정권)를 바라보는 두 지도자의 시각 차이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될 수 있다는 통찰로 이어지는 전개는 저로 하여금 '무조건 루스벨트와 히틀러를 대비시키는 편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준비물은 간단합니다.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두 인물의 흑백 이미지(주1)와 적절한 제목, 참 쉽죠?

위기의 시대 엇갈린 리더십
과거서 희망을 일궈낸 지도자
과거에 책임을 전가한 독재자

개인적으로는 메인 꼭지보다 깔끔하게 나온 것 같아서 (아주 조금) 만족입니다. 좀 더 다듬는다면 '희망을/책임을'에서 '을'이란 조사를 빼는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뱃살과 불필요한 토씨는 뺄수록 좋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참, 두 인물을 가깝게 그리고 대등하게 배치하려면 얼굴의 크기도 크기지만, 눈의 높이를 맞춰주는 쪽이 좋아요. 얼굴 크기를 자로 재서 맞춘다고 해도 눈의 위치가 어긋나면 어색하거든요.

사실 예전에도 대비를 활용한 적이 있었는데요, 공교롭게도 같은 지면 같은 사이드 꼭지였습니다. 대비도 불치병(...).

막장 오브 막장,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의 실패한 리더십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글의 절반은 아프리카와 중동에 희망의 리더십을 전파하던 혁명 영웅 '젊은 카다피'를,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리비아의 재앙이자 망나니 독재자인 '늙은 카다피'를 다루고 있습니다. 글을 읽고 '이거다!' 싶어서, 모든 요소를 대비에 맞춰 편집했습니다. 사진, 제목은 물론이고 본문 바탕 색깔도 대비를 이루도록 작업했습니다. 좀 더 극명한 효과를 노렸다면 아예 검은 색 바탕에 흰색 글자를 깔았겠지만, 기술적인 문제(주2) 때문에 타협했어요. 본문 양도 조절해 정확히 둘로 나눴습니다. 이히히 신난다. (← 대비병 말기)

주1) 히틀러 이미지는 짝퉁(...)이 하도 많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다들 그럴듯한 게 더 문제.
주2) 검은 색 바탕에 흰색 글자 본문은 일단 ⓐ 가시성은 좋을지 몰라도 가독성(可讀性 ; 인쇄물이 얼마나 쉽게 읽히는가 하는 능률의 정도)은 떨어지고 ⓑ 세리프(Serif ; 명조체 등 삐침이 있는 형태의 글꼴)의 본문 글자는 획의 굵기가 얇기 때문에 인쇄를 할 때 판이 약간만 어긋나거나 지질로 인해 검은 색 잉크가 조금이라도 번질 경우 글자가 바탕에 먹히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비난하기 보다는 끌어안기를 택하고, 책임을 전가할 도구로 이용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희망을 일궈낼 수 있음을 믿었던 루스벨트. 이번 정권의 임기가 절반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 '잃어버린 10년' 탓을 해대는 걸 보면서 한 마디 해주고 싶네요. 대구를 살려서요.

서민 걱정 척하지 
잘 풀리면 뻐기지 
수 틀리면 탓하지
불똥 튀면 피하지
니들 땜에 열받지


관련링크
매일경제 2011년 5월 29일자 기사 - #1 트렌드
매일경제 2011년 5월 29일자 기사 - #2 루스벨트
매일경제 2011년 4월 9일자 기사 - 카다피
유엠씨(UMC/UW) 인터뷰를 통해서 본 그의 가사와 라임(rhyme)에 대한 사견


덧글

  • zena 2011/05/31 09:45 # 삭제 답글

    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잘읽었어^^ 요즘들어 이런일이 좀 늘어나서..(사업설명서를 제작한다거나,..;) 제목뽑고, 편집하는데 도움이 되네.
  • Charlie 2011/06/05 13:18 #

    이런 잉여 기획물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ㅎㅎ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