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 로그인  


태그 : 양재고등학교ㅆㅂㄹㅁ

더럽게 슬픈 이야기

* 식사 전후에는 읽지 마세요(...).

어제 시험을 하나 보고 왔습니다. [KBS 한국어 능력 시험]이라고, 말 그대로 한국어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 독해 등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수준을 확인해볼 수 있는 시험인 만큼 자신이 쓴 글을 웹에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블로거라면 한번쯤 응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9 시쯤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양재 고등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상당히 역사가 깊은 학교인지, 건물은 많이 낡았지만 교정 곳곳에 녹음이 우거진 모양새가 참 보기 좋았습니다. 현관에서 수험 번호와 교실을 확인하고 4 층에 올라갔습니다. 공부한 내용을 다시 보고 있자니 어느새 9 시 30 분. 한 두 명만 있던 교실도 어느덧 가득 찼습니다. 물론 몇몇 자리는 오지 않는 응시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요. 여느 시험과 마찬가지로 답안지를 받고, 간단한 인적 사항과 수험 번호를 적고, 신분 확인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것'이 왔습니다.

인간의 일차적/생리적 욕구 중 하나인 '그것'은 생산보다는 소비, 소득보다는 지출, 투입보다는 배출(...)에 한없이 가까운 활동으로 다른 욕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대 받고 터부시되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용변[evacuation]에의 욕구, 즉 #  마렵다 # 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이하 본문에서는 저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을 고려해 '변의(便意)'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음, 생각해보니 아예 무관한 단어를 잠시 차용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앞으로는 '그것'을 존(john)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아무튼 갑작스런 존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저는 신분 확인 작업 중인 감독관에게 다가가 얘기했습니다.

"존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원래 안되지만, (당신 표정을 보아하니) 허락하겠습니다. 빨리 다녀오세요."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화장실('존 알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에 당도했습니다. 화장지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고등학교. 백화점 화장실처럼 화장지가 준비돼 있겠거니 생각한 저의 안일함이 가져온 참극이었습니다. 침착해. 찬찬히 생각해보자. ...나 양말을 신고 있었네... 아니야! ...사람의 손은 왜 두 개가 있을까... 틀려!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미안, 존. 우리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갖자.

10 시 정각, 시험 개시. 시험은 듣기 평가 10 문항을 포함해 객관식 5지 선다형 100 문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10 시부터 12 시까지 별도의 휴식 시간 없이(!) 진행됩니다. 시험 중 퇴실은 불가능. 처음 30 분 정도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시험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존은 이제 돌아간 것일까 (그러니까 어디로) - 라고 안심했을 무렵, 훗날 '세컨드 임팩트'라 회자되는 미증유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John strikes back, 존이 돌아온 것입니다.

안, 안돼. 존... 이건 너무 이르잖아...

존은 연신 초인종을 눌러대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25. 밑줄 친 부분의 쓰임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넌 친구가 하랜다고 다 하니?
② 내 친구들이 집에 간다니까 그렇게 흐읍!
③ 지갑을 만진대서더헛!
④ 변명같이 들리시겠지만 으윽!!
⑤ 여웃골을 겨우 벗어난 할아버지는 인마 존!!
집중이 될 리가 있나. 제가 문제를 풀었는지 문제가 저를 풀었는지 모를 극도의 공황 상태에서 30여 분이 흘렀습니다. 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존과 함께 스물하고도 몇 년을 보낸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존은 그리 쉽게 물러나는 친구가 아니라는 것쯤은요. 태풍의 눈에서 느껴지는 숨막히는 고요와 적막, 더 큰 재앙을 잉태한 잠깐의 평화.

이윽고 '서드 임팩트' 내습(來襲). 쾅쾅쾅쾅 쉬지 않고 문을 두드려대는 존은 이제 더이상 인내심 많은 방문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답안지인 OMR 카드가 쭈글쭈글해질 정도로 식은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었습니다. 존의 강렬한 어필에 OMR 카드 위에 답을 체크하던 연필이 김연아급 트리플 악셀을 펼쳐 보이길 수 차례. 그런데 위기야말로 재능을 꽃피우기 위한 최고의 비료(하필이면 왜 '이런' 단어를...)이기 때문일까요, 분명 지문 속 (가) 문단을 읽고 있었는데,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보면 어느새 (마) 문단을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난 속독왕(速讀王)이 된 거구나, 그렇지 존?

11 시 30 분. 중국의 속담 중에는 '100 리를 가는 자는 90 리를 중간 지점으로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나기 직전이 가장 힘든 법이기에 마지막까지 안심하거나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시험 종료 30 분 전, 존의 흉폭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this clip [The Shining] ⓒ 1980 Stanley Kubrick
Here'sssssssssss John!

** 시간 관계 상 더럽게 슬픈 이야기, 2 부에서 계속됩니다.
***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존의 방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휴지는 상비합시다.

by Charlie | 2008/05/12 11:06 | 만물잡화고물상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3)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