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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john

더럽게 슬픈 이야기, 두 번째

* 식사 전후에는 읽지 마세요(...).
** 더럽게 슬픈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시험 종료를 30 분 앞둔 시점에 다시 찾아온 존은 예전의 존이 아니었습니다. 생리적 현상을 초월해 '절대악'으로 화(化)한 존은 보잘것없는 인간의 심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남은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실낱같은 의지뿐이었습니다. 최악의 사태 - 시험 중에, 그것도 교실에서 존을 만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인간폐업'의 기시감이 느껴졌습니다. 존, 똑똑히 들어둬.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평생 코르크 마개로 널 봉인하겠어. 그래, 내가 X독이 올라 죽는 한이 있어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더 이상은 도저히... 포기해선 안돼! - 의문과 절망, 그리고 작은 용기의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저는 문제를 풀었습니다. 아니, 풀어야만 했습니다. 시험을 포기할 수 없어서 - 와 같은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존을 잊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존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5 분 간격으로 존의 공격은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온몸을 비틀고, 시험지를 긁어대고, 애꿎은 지우개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다음이야말로 끝장이라고 다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버텨 주었고 고통은 지속됐습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임팩트. 앉지도, 서지도 못한 제 몸은 그야말로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기 위해 꼭 다문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시험을 치루기 전에는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하나 - 적잖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덜미에 느껴지는 존의 존재는 제가 필사의 전력질주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친 존이 등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마당에 문제 따위(...)에 매달릴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아홉 번째 임팩트, 그러니까 시험 종료 5 분 전에 모든 문제를 다 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한시바삐 이 오라질(...) 시험을 끝내고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시험 종료까지 앞으로 3 분 남았습니다. 수험생 여러분들은 답안지를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임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3 분과 뜨거운 철판 위에서 맨발로 탭댄스를 출 때의 3 분이 결코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무심한 안내 방송 멘트를 들으며 보낸 그 때의 3 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3 분이었습니다.

마침내 시험이 끝났습니다. 제 인생이 끝나기 전에 시험이 먼저 끝나 다행이었습니다. 맨 뒷자리의 사람이 답안지를 수거하고, 그 다음 사람이 문제지를 회수합니다. 뭐가 이리 복잡해 좀 빨빨빨빨빨리 끝내란 말이야! 그런데 마지막까지 답안지를 채워 넣느라 바쁜 수험생에게 감독관이 경고를 주고, 그 와중에 수거 과정이 지연... 그냥 내! 막판에 찍어봤자 점수 안나와! -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필기 도구 등을 가방 속에 쓸어 담고, 교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챙겨서는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화장실엔 휴지가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실 뒤 휴지걸이에 희망을 걸기로 했습니다. 시험이 끝나 어수선한 분위기의 교실들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교실, 없었습니다. 두 번째 교실, 마찬가지로 없었습니다. 세 번째 교실, 텅빈 휴지걸이뿐.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역시 없었습니다. 대체 여기 주번은 뭘 하는 거야!

3 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십만 대군의 존, 십만 대존이 괄약근으로 돌격하는 듯한 이 상황에서 계단은 아이언 메이든보다 더 무서운 고문 기구였습니다. 3 층 화장실에도 역시 화장지는 전멸. 3 층의 모든 교실 역시 화장지 전무. 양재 고등학교 학생들은 존도 안만나고 산단 말인가.

2 층으로 내려갔습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K2 정상을 정복하는 느낌으로 내려갔습니다. 지금의 체력으로는 2 층을 탐사하고 1 층으로 내려갈 여력이 없어, 2 층도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휴지가 없을 거라고 믿고 버릴 수밖에 - 라는 생각을 가지고 1 층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학교 건물을 빌려 치뤄지는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듯, [KBS 한국어 능력 시험] 역시 교무실이 있는 층에 고사 본부가 설치됩니다. 교무실 → 교사들이 근무하는 곳 → 교사가 사용하는 화장실 → 아앗, 교직원용 화장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연상 작용의 끝에 보인 마지막 희망,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교직원용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하하하 요 녀석♡ 일단 내가 학생이 아닌 것은 둘째로 치더라손, '위반 시 벌점 2 점'이라... 지금 인생에 오점 2점, 아니 마침표를 찍게 생겼는데 그까짓 벌점 2 점으로 나와 존, 존과 나를 막을 심산이더냐 하하하 고것 참 깜찍하니 두 대만 맞자.

귀여운 경고 메시지를 뒤로 하고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휴지가 있든 없든 여기가 나와 존의 종착지. 제발... 제발 부탁이야... 조용필이 부른 [비련] (1982)의 가사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첫 칸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방금 교체한 듯 풍만한 엠보싱 두루마리 화장지(심지어 절취선도 있는)와 웅진 룰루 비데가 있었습니다(...).

...이, 이것이... 사회 기득권층의 횡포인가! 승자독식의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란 말인가!! 학생들은 휴지 한 점이 없어 엉덩이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칠 때, 교직원들은 비데가 주는 쾌락의 향연에 몸을 맡긴단 말인가!!! 학생들 역시 엠보싱으로 깔끔하고 부드럽게 존과 이별할 권리를 지니고 있단 말이다! 아니, 오히려 오랜 시간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학생들이야말로 엠보싱과 비데가 더욱 절실하지 않겠는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내일부터 당장 1 인 시위를 시작한다! 학생들의 쾌적한 존(john)권 확보를 위해서라면 내 한몸 기꺼이 퇴비가 되리라!!

- 라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존과 이별했습니다. 나이스 교장 선생님.

안녕히, 존. 너와는 이런 사이로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덧) 여러 가지 의미로 시험 점수가 기대되네요. ...술이나 마실까.

또덧) 시험 당일, 제 뒤에 앉았던 분께 사과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저라도 앞에 있는 사람이 경련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 확실히 신경쓰였을 것 같습니다. 부디 제가 시험에는 방해가 안되었기를 바라며, 좋은 결과 내길 바랍니다.

***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존의 방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휴지는 상비합시다.

by Charlie | 2008/05/15 02:12 | 만물잡화고물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더럽게 슬픈 이야기

* 식사 전후에는 읽지 마세요(...).

어제 시험을 하나 보고 왔습니다. [KBS 한국어 능력 시험]이라고, 말 그대로 한국어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 독해 등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수준을 확인해볼 수 있는 시험인 만큼 자신이 쓴 글을 웹에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블로거라면 한번쯤 응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9 시쯤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양재 고등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상당히 역사가 깊은 학교인지, 건물은 많이 낡았지만 교정 곳곳에 녹음이 우거진 모양새가 참 보기 좋았습니다. 현관에서 수험 번호와 교실을 확인하고 4 층에 올라갔습니다. 공부한 내용을 다시 보고 있자니 어느새 9 시 30 분. 한 두 명만 있던 교실도 어느덧 가득 찼습니다. 물론 몇몇 자리는 오지 않는 응시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요. 여느 시험과 마찬가지로 답안지를 받고, 간단한 인적 사항과 수험 번호를 적고, 신분 확인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것'이 왔습니다.

인간의 일차적/생리적 욕구 중 하나인 '그것'은 생산보다는 소비, 소득보다는 지출, 투입보다는 배출(...)에 한없이 가까운 활동으로 다른 욕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대 받고 터부시되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용변[evacuation]에의 욕구, 즉 #  마렵다 # 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이하 본문에서는 저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을 고려해 '변의(便意)'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음, 생각해보니 아예 무관한 단어를 잠시 차용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앞으로는 '그것'을 존(john)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아무튼 갑작스런 존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저는 신분 확인 작업 중인 감독관에게 다가가 얘기했습니다.

"존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원래 안되지만, (당신 표정을 보아하니) 허락하겠습니다. 빨리 다녀오세요."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화장실('존 알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에 당도했습니다. 화장지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고등학교. 백화점 화장실처럼 화장지가 준비돼 있겠거니 생각한 저의 안일함이 가져온 참극이었습니다. 침착해. 찬찬히 생각해보자. ...나 양말을 신고 있었네... 아니야! ...사람의 손은 왜 두 개가 있을까... 틀려!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미안, 존. 우리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갖자.

10 시 정각, 시험 개시. 시험은 듣기 평가 10 문항을 포함해 객관식 5지 선다형 100 문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10 시부터 12 시까지 별도의 휴식 시간 없이(!) 진행됩니다. 시험 중 퇴실은 불가능. 처음 30 분 정도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시험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존은 이제 돌아간 것일까 (그러니까 어디로) - 라고 안심했을 무렵, 훗날 '세컨드 임팩트'라 회자되는 미증유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John strikes back, 존이 돌아온 것입니다.

안, 안돼. 존... 이건 너무 이르잖아...

존은 연신 초인종을 눌러대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25. 밑줄 친 부분의 쓰임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넌 친구가 하랜다고 다 하니?
② 내 친구들이 집에 간다니까 그렇게 흐읍!
③ 지갑을 만진대서더헛!
④ 변명같이 들리시겠지만 으윽!!
⑤ 여웃골을 겨우 벗어난 할아버지는 인마 존!!
집중이 될 리가 있나. 제가 문제를 풀었는지 문제가 저를 풀었는지 모를 극도의 공황 상태에서 30여 분이 흘렀습니다. 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존과 함께 스물하고도 몇 년을 보낸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존은 그리 쉽게 물러나는 친구가 아니라는 것쯤은요. 태풍의 눈에서 느껴지는 숨막히는 고요와 적막, 더 큰 재앙을 잉태한 잠깐의 평화.

이윽고 '서드 임팩트' 내습(來襲). 쾅쾅쾅쾅 쉬지 않고 문을 두드려대는 존은 이제 더이상 인내심 많은 방문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답안지인 OMR 카드가 쭈글쭈글해질 정도로 식은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었습니다. 존의 강렬한 어필에 OMR 카드 위에 답을 체크하던 연필이 김연아급 트리플 악셀을 펼쳐 보이길 수 차례. 그런데 위기야말로 재능을 꽃피우기 위한 최고의 비료(하필이면 왜 '이런' 단어를...)이기 때문일까요, 분명 지문 속 (가) 문단을 읽고 있었는데,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보면 어느새 (마) 문단을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난 속독왕(速讀王)이 된 거구나, 그렇지 존?

11 시 30 분. 중국의 속담 중에는 '100 리를 가는 자는 90 리를 중간 지점으로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나기 직전이 가장 힘든 법이기에 마지막까지 안심하거나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시험 종료 30 분 전, 존의 흉폭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this clip [The Shining] ⓒ 1980 Stanley Kubrick
Here'sssssssssss John!

** 시간 관계 상 더럽게 슬픈 이야기, 2 부에서 계속됩니다.
***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존의 방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휴지는 상비합시다.

by Charlie | 2008/05/12 11:06 | 만물잡화고물상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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